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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바등/◇

[해량무현] LOVE BEGETS XXXX

by 30 2023. 5. 22.

지난 2월 NPIUS 춘계 전사원 단합대회(통판온) 에 냈던 배포본입니다. (전체 32p)

원래 계획은 웹공개 올릴때쯤 후일담 써서 같이 올려야지 히히...< 였는데

아직이네요...제목만 있음...그래도 언젠가는! ..아마도?

봐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세줄요약)
방수기지 해무 / '꽁냥거리면 돈이 생기는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만화를 보고 소재를 빌려왔습니다.
제목처럼 둘이 꽁냥거리거나 스킨십을 하면 하늘에서 돈이 떨어집니다.
원리나 논리는 없고요(원작 만화에서는 있습니다만) 돈을 핑계로 수작부리고 싶었습니다,,

 

 


 

 

 


“새로 온 치과 선생님이십니까.”
“아, 예, 예…….”


공중을 360도 회전하는 미친 헬기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눈앞이 팽글팽글 돈다. 박무현은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세웠다. 이렇게 흐느적거리는 몰골을 보고도 새로 온 환자냐고 묻는 게 아니라 치과의사라고 알아봐 주다니 눈썰미가 되게 좋은 사람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쳐다본 얼굴은, 눈썰미는 둘째치고 일단 눈이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었다. 단단한 눈매 위로 그린듯한 눈썹도, 눈 밑으로 곧게 뻗은 콧대도, 그 아래의 입술도……. 이야, 턱선도 예술이네.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부럽다. 해저기지 홍보모델인가? 이런 사람이 해저기지에 어서 오십시오, 하면 예 어서 가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한 트럭일 것 같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게 멀미 후유증 때문인지 저 남자 주변에 조명이 켜진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잠깐의 감상시간 뒤에 잘생긴 남자가 잘생긴 손을 내밀고 잘생긴 목소리로 말했다.


“엔지니어 가팀 팀장 신해량입니다.”
“박무현입니다. 어…….”


자신을 마중 나온 커다란 손을 맞잡은 박무현의 시선이 옆으로 스르륵 돌아갔다. 악수하면서 다른 곳을 보는 게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녹색 종이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지면서 온몸으로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어디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가는데 한국인이면 몰라볼 수 없는 세종대왕의 용안이 담긴 지폐의 등장이라니.


만 원이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까지 눈으로 궤적을 좇던 박무현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허리를 숙여서 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집어 든 것을 곧장 신해량에게 내밀었다. 지폐가 떨어지고 박무현이 그것을 주워드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보고 있던 신해량은 코앞의 돈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몇 초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제 돈이 아닙니다.”
“어……제 돈도 아닌데요.”


여기 그쪽이랑 나밖에 없는데. 누가 흘린 거냐 그럼. 당황한 박무현이 지폐를 들고 두리번거리다 아까 닫힌 헬기 문까지 돌아보는 사이에 신해량이 박무현의 캐리어를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어, 어어. 제가 들겠습니다.”


앗 하는 사이에 짐을 뺏겨버린 박무현은 자신의 캐리어를 덥석 납치해서 성큼성큼 멀어지는 신해량을 따라가며 손을 뻗었다. 마중 나와준 것도 고마운데 짐꾼까지 시킬 수는 없다. 짐의 무게를 익히 알고 있는 손이 허둥지둥 끼어들었지만, 손잡이를 선점한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박무현은 쇳덩이 같은 남자의 손등을 몇 번 더듬기만 하다가 멋쩍어하며 물러났다. 남의 손을 만지작거린 점을 민망해할 틈도 없이 어디선가 또 팔랑, 돈이 떨어졌다.


“……?”


영문 모를 돈이 벌써 2만 원째다. 캐리어에서 흘러나왔다기엔 거기에 넣어둔 돈이 없으니 말이 안 되고, 신해량이 흘렸다기에는…….


“아닙니다.”
“예…….”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내민 돈을 거절하는 태도가 여전히 단호했다. 한 번 뒤져보지도 않고 단칼에 말하는 걸 보면 신해량의 주머니에도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럼 누가 떨어뜨린 게 바람에 날려온 건가. 한국 돈이니 주인은 일단 한국인……. 아니, 각국 화폐를 모으는 취미를 가진 외국인일지도. 어떻게 주인을 찾아줘야 하나. 해저기지에도 분실물센터 같은 게 있겠지? 근데 현금은 어떻게 주인을 확인할까. 금액으로? 원래 더 큰 금액을 잃어버린 건데 바람에 흩어지고 2만 원만 돌아온 거면 금액이 맞지 않을 텐데. 그럼 일련번호로? 지폐 일련번호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난 일련번호가 몇 자리인지도 모르는데…….


박무현이 갓 찍어낸 듯 빳빳한 지폐 두 장을 주머니에 챙겨 넣지도 않고 곤란한 얼굴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사이, 우리의 잘생긴 신해량 팀장은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박무현과 달리 그는 돈이 나타나는 장면을 정확히 보았다. 어딘가에서 떨어지거나 날려온 것이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지폐가 생겨나는 순간을.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지만, 이십 년 넘게 판단 기준으로 삼아 온 자신의 감각을 두 번이나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신해량은, 연녹색으로 칠해진 건물 앞에서 캐리어를 잠시 내려놓았다.


“선생님의 방은 백호동 38번입니다. 짐은 그 안에 넣어두겠습니다.”


그리고 박무현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한 번 더 악수를 청했다. 아까 악수했는데 왜 또 하냐는 의심도 없이 순진하게 신해량의 손을 마주 잡은 치과의사는 감사합니다. 제가 다음에 커피 한 잔 사겠습니다, 하고 웃었지만, 신해량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날카로운 눈을 살짝 굴렸다.


짧은 계산을 마친 손끝이 무방비한 상대의 손바닥을 간질이듯 훑고 지나가자마자 세 번째 만 원짜리가 기다렸다는 듯 살랑살랑 떨어져 내렸다.







해저기지에 도착한 지 삼십 분도 안 되어 주운 만 원짜리 세 장은 서명한 계약서와 함께 프리야 쿠마리에게 맡겼다. 다행히 그 뒤로는 길 잃은 지폐를 또 줍지도 않고 스스로 길을 잃는 일도 없이 백호동 38번 방에 도착했고, 신해량에게 납치당했던 캐리어도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위치에 무사히 놓여있었다.


‘감사 인사를…….’


캐리어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나르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손잡이를 잡아 들었던 박무현은 1초 만에 한 손을 더 보태며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해야지.’


응. 그럼. 두 팔에 느껴지는 무게를 애써 무시한 박무현은 캐리어를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간단히 짐 정리를 한 후 지급 받은 패드를 들었다. 직원 검색결과에는 사진도 없이 신해량의 이름 석 자만 떠올랐지만, 박무현은 마주 보았던 눈빛과 닿았던 손의 온기를 쉽게 떠올리며 자판을 두드렸다.


[박무현입니다. 짐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시간 편하실 때 말씀 주시면 커피 사겠습니다.]


답장은 3일이 지나고 나서야 돌아왔다.


[예. 오늘이 좋겠습니다.]
“…….”


그리고 그건 해저기지의 유일한 치과의사가 어느 엔지니어의 입안에서 깨진 어금니로 테트리스 한 판을 막 끝낸 시간이기도 했다. 아, 오늘이요. 그럼요. 사드려야죠. 근데 신해량 씨, 본인 별명이 캐새키인 거 알고 계셨습니까? 전 별로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박무현은 패드에 뜬 어금니 학살자의 이름을 할 말 많은 눈으로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쉬고 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박무현이 잡아 본 신해량의 손은 분명 크고 단단했다. 하지만 만나서 반갑다고 오른뺨을 치고 헤어질 때 또 보자고 왼뺨을 치는 무지막지한 손이 아니라 환영의 악수를 나누고 무거운 짐을 기꺼이 들어주는 손이었다. 


그래, 그랬기 때문에 그 주먹에 맞았다는 환자들이 돌아가면서 치과에 찾아와 ‘씬해량 캐새키’를 돌림노래처럼 불러대도 박무현은 캐리어를 들어주던 뒷모습에 건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이야기는 양쪽 모두 들어봐야 하는 법이기도 하고, 사내놈들 싸움 얘기는 툭하면 몇 배씩 부풀기 마련이기도 하니까…….


“아, 팀장님! 징그럽거든요, 진짜?”


지친 직장인의 발걸음으로 약속장소를 향해 걷던 박무현의 귀를 서지혁의 목소리가 잡아 돌렸다. 복도 저 너머로 고개를 빼고 보니, 옅은 담배 냄새를 달고 치과에 왔던 청년이 넓은 가슴 위로 팔을 교차시켜 엑스 자를 그린 채로 신해량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직 지현이하고도 못 해봤는데!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그냥 패시라고!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질색팔색하는 서지혁과 달리 신해량은 미간만 살짝 찌푸린 채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시험해볼 게 있다고 했잖아.”


이제 됐어, 가 봐. 냉정한 팀장의 말에 서지혁이 입으로 흑흑 우는 소리를 내고는 빠르게 퇴장했다.


벽에 바짝 붙어 선 박무현은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도와주고 직장 동료들은 턱을 후려치는 손이 부하 직원에게는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시험? 뭘? 뭐가 됐든 서지혁은 원치 않았던 것 같은데. 사내 괴롭힘 같은 걸로 신고한다면 내가 증인이 되어줄 수 있다고 말을 전해두는 게 좋겠지? 근데 어째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지는 것 같은…….


“커피는 됐으니 장소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조용한 곳으로 가서 대화하시죠. 낮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걸어 나왔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나타난 신해량이 박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둘이 탄 엘리베이터는 신해량의 덩치 때문인지 긴장감 때문인지 넓은데도 좁게 느껴졌다. 박무현은 문 위, 층수 표시가 뜨는 부분만 열심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날 어디로 데리고 갈 셈이지. 인적 드물고 CCTV도 비추지 않는 뭐 그런 곳? 그런 장소로 갈 것 같으면 아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말고 버텨볼까, 생각하던 와중에 거대한 기계가 덜컹, 불안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멈춰섰다.


“어…….”


멍한 얼굴에 질문을 담자 신해량이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예. 제가 정지시켰습니다.”


난 그냥 이게 멈춘 거냐고 물어보려는 거였는데, 왜 멈췄는지까지 알려주다니 친절하기도 하지. 조용한 곳으로 가자더니 지금 있는 곳을 조용하게 만들어버릴 줄이야. 엘리베이터에서 안 내릴 생각을 했더니 그걸 또 어떻게 알고 아예 못 내리게 해주네. 허허.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투명한 벽이었지만 어두운 바닷속이라 마치 거울처럼 안이 비쳐 보였다. 박무현은 벽에 비친 모습을 힐끔 곁눈질했다. 멈춘 엘리베이터, 위험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잘생긴 남자와 단둘이. 근데 알고 보니 엘리베이터를 멈춘 게 바로 그 남자였다? 나 이거 알아. 공포영화에서 봤어. 화면 구석에 빨간 딱지도 있었던 것 같아.


“여기 처음 오신 날, 제가 선생님을 마중 나갔을 때 돈이 떨어진 걸 기억하십니까?”


박무현은 만 원짜리 세 장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프리야 쿠마리가 습득물 안내 방송을 해준다고 했었는데 주인을 찾았는지 모르겠다. ……근데 왜 가까이 오냐. 엘리베이터에 우리 둘뿐이라 그렇게 가까이 오지 않아도 잘 들리는데. 갑자기 접근하는 신해량을 피해 주춤주춤 물러난 등에 차가운 벽이 닿았다. 신해량은 박무현의 상상처럼 등 뒤에서 피가 묻은 손도끼를 꺼내……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맨손을 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커다란 손이 바짝 긴장한 뺨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얼굴의 절반을 감쌌다가 사라지는 온기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기다란 손가락이 눈앞에서 지폐를 잡아채는 광경이 보였다.


“선생님과 닿을 때 이렇게 돈이 생기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
“그래서 선생님께 협조를 요청하고자 합니다.”
“……?”


신해량의 손가락에서 만 원짜리를 빼낸 박무현은 마술 트릭을 찾는 관객처럼 천장을 봤다가 바닥도 보고 돈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파랗고 검은 눈에서 물음표가 사라지기를 얌전히 기다리던 신해량은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악수할 때 한 번, 선생님이 손잡이 위로 제 손을 감싸 잡았을 때 한 번. 그래서 확인차 악수를 재차 해봤는데 그때는 나오지 않아서 제가 선생님의 손바닥을 가볍게 긁었더니 나왔습니다.”


그때 손바닥이 찌릿했던 게 긁은 거였냐. 난 갑자기 왜 정전기가 일어나나 했었는데. 뒤늦은 깨달음에 박무현이 무고한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사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신해량이 지폐 3장을 더 꺼냈다. 첫날의 그 돈을 찾아온 건가 했더니, 3일 동안 저를 두고 재확인하면서 생긴 돈이란다.


“옷 위로 만졌는데도 나오더군요.”


어깨, 등, 허리. 담담한 목소리와 시선으로 툭툭 지목하는 위치를 박무현이 황당한 눈으로 따라서 더듬었다. 지금 날 최소 3번 만졌다고 한 거야? 언제? 아니, 진짜 언제? 어떻게? 우리 3일 만에 보는 거 아니었어?


아무 느낌 안 드는 옆구리를 주물거리는 박무현의 표정을 고스란히 읽어낸 신해량은 주인의 주머니에서 간식을 몰래 빼먹은 개처럼 옆으로 눈을 굴렸다.


“민감한 타입은 아니신가 봅니다.”
“…….”
“……선생님도 만져보시겠습니까.”


몸이 둔해서 미안하다, 하고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박무현이 그 말에 신해량의 몸을 보며 머뭇거렸다. 뭐든 사기를 안 당하려면 직접 확인해보는 게 최선이기는 한데. 다른 사람 몸을 만져본 경험이라고는 턱 위로 집중되어있는 손이 남자의 턱 아래에서 크게 방황했다.


“그, 어디가 괜찮습니까?”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허락이 떨어졌는데도 한참을 망설이던 손이 예상보다는 말랑한 팔뚝 근육을 만지며 감탄하고 있을 때, 신해량은 자신의 턱밑에 자리한 동그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지폐를 잡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과는 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나도 치과에서 여러 명 입에 손을 넣었지만 동전 하나 안 생겼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난 며칠 간의 치료를 되짚어보던 박무현은 그 여러 명 중 대다수가 신해량의 거친 접촉을 받고 왔던 것을 떠올리고 창백해졌다.


“설마 주먹으로 확인하신 건.”
“아닙니다.”


수상할 정도로 즉답이었다. 3일 안에 생긴 싱싱한 상처로 보이는 건 없었지만 치과에 안, 아니, 못 온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박무현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딥 블루 환자 공급의 최고 공헌자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조금도 찔리는 구석이 없다는 얼굴로 가볍게 웃었다.


“최근에는 시비 거는 놈이 없어서 그렇게 확인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확인하게 되면 알려드리지요.”
“아니요, 평생 모르고 싶습니다…….”


웃지 마라, 정든다. 보기 좋게 올라간 입꼬리에서 시선을 뗀 박무현은 기운 빠진 어깨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돈을 토해보라고 사람을 자판기 치듯 치고 다니는 성정은 아닌 듯하니 다행이다.


주머니에서 꺼낸 돈, 새로 나온 돈 모두를 박무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신해량이 엘리베이터 기판 쪽으로 걸어갔다. 뭔가를 누르는 건지 때리는 건지 모를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버튼에 불이 들어오고 멈췄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액은 반으로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신해량이 맡긴 지폐를 손바닥 접시에 담고 있던 박무현은 바스락거리는 종이 장수를 대강 헤아려보았다. 이거의 절반……. 그것만 해도 커피가 몇 잔일까.


“돈은 어디에 쓰려고 그러십니까?”


기본적인 숙식은 제공되고, 커피도 간식거리도 공짜에 가깝게 널려있다. 팀장 정도면 월급도 상당할 것 같은데. 나처럼 빚이라도 있나? 꽤 사적인 이유까지 상상해보고 있었는데 신해량의 입에서 나온 건 상당히 공적인 목적이었다.


“팀원들이 사용하는 소모품 비용에 보태려고 합니다.”
“어……. 업무 중에 쓰는 물품이면 지원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런. 고된 직장인의 애환이 느껴지는 대답에 박무현은 눈앞의 넓은 어깨를 말없이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거기서 나온 만 원은 신해량의 몫으로 얹어주었다.


엘리베이터를 멈춰놓은 사이에 기다리던 사람이 많았는지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순식간에 구석으로 몰린 박무현이 지폐를 접어 넣는 동안 몸으로 반쯤 가려주고 있던 신해량이 엘리베이터 벽을 한쪽 팔로 짚고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따 방으로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어딘가 간지러운 속삭임에 어깨가 작게 떨렸다. 입이 귀에 닿지는 않았다. 아주 가깝긴 했지만 분명 닿지는 않았는데……. 몸을 덮고도 남을 커다란 그림자. 얼굴 바로 옆으로 버티고 선, 어떤 감촉인지 이미 알고 있는 팔. 속눈썹을 세어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자신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한껏 낮아진 목소리. 그 모든 것에 순간적으로 생각이 끊긴 틈으로……돈이 떨어졌다.


“? 이건 왜 나왔는지 모르겠군요.”
“그, 그러게요.”


신해량이 돈을 줍는 사이에 박무현은 열이 오른 목덜미를 문질렀다.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평소 73.2kg과 주황색 솜인형 정도만 감당하던 침대 위로 105.3kg가 추가로 훌쩍 올라왔다. 커다란 손 아래 단단히 붙잡힌 몸이 매트리스를 대신해서 짓눌린 소리를 더듬더듬 뱉어냈다.


“그으, 이런…이런 걸로도 돈이…허억, 나올, 까요…….”


방주인을 침대 위에 엎어놓고 어깨와 등의 뭉친 근육들을 차례차례 누르고 주무르던 신해량의 손이 옆에 떨어진 지폐를 집어다 친절하게 눈앞에 놓아주었다.


“나오는군요.”


그럼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냐.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문장의 반도 완성하기 전에 민망한 소리나 낼 것 같아 그만두었다. 누르면 소리 내는 인형이 된 기분이 이럴까. 아니다. 인형은 뱃속에 깜찍한 소리라도 들었지, 온몸이 뻣뻣해진 지친 직장인은 눌러봤자 흐억, 끅, 어헉, 같은 해괴한 소리만 나온다. 그렇다고 숨을 참고 버티면,


“힘 빼십시오, 선생님.”


기다렸다는 듯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박무현은 발개지려는 얼굴을 베개에 누르고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지금 난 밀가루 반죽이다. 의식하지 말자. 난 반죽이다…. 자기 최면을 걸며 나름대로 몸의 힘을 빼다가도 신해량의 손이 닿는 곳마다 반사적으로 긴장이 맺혔다.


그래도 시간에는 장사가 없는지, 남의 오복 중 하나를 가차 없이 박살 내고 다니는 흉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한 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긴장했던 몸이 서서히 노곤하게 풀렸다. 눈도 깜빡, 감기려고 해서 박무현은 의식적으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안마를 시켜놓고, 아니 따지자면 이쪽이 시킨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편하게 늘어져 자버릴 수는 없었다. 잠들지 않으려고 여기저기 열심히 굴러다니던 눈이 베개 옆에 올려진 지폐에 걸렸다. 


신해량은 저 돈을 소모품 비용에 보탤 거라고 했지. 땅을 파도 쓰레기만 나오지 백 원 하나 줍기 힘든 세상에 지폐면 큰돈이지만, 이걸로 뭘 사느냐에 따라 다를 터다. 보탬이 잘 되려나?


소모품이라면 뭘 사는 걸까. 사무직이 아니니 문구류 같은 건 아닐 거라는 짐작은 되지만, 엔지니어들이 일할 때 뭘 쓰는지 모르겠다. 드라이버 같은 게 금방 닳을 리는 없고……장갑 같은 거?


“장갑에 신발……절연 테이프 하나도 다 돈입니다.”


박무현의 질문에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연 신해량이 덧붙였다.


“바닷물에 닿는 것만으로 모든 게 빨리 닳고, 뭐든 육지보다 비싸지더군요.”


장갑이나 신발, 테이프 정도면 금방 돈이 채워지려나, 생각하고 있던 박무현은 뒤따른 그 말에 생각을 슬쩍 접었다. 역시 하루 이틀로는 안 될지도.


“다른 팀들도 사정이 비슷합니까?”
“다른 팀들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대부분 지원이 충분할 거라.”


그 엔지니어들이 기지를 보수하고 관리하는데 거기 사는 사람이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박무현의 상상은 그새 어느 팀은 물 새는 곳을 단단하게 덧대고 나사못 박아서 막고, 어느 팀은 테이프만 겨우 붙여서 틈새로 물이 졸졸 새어 나오는 모습 따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팀은 달라도 업무가 같은데 아예 해저기지 차원에서 용품을 지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사탕 같은 건 공짜나 다름없이 자판기가 곳곳에 널려있으면서. 차라리 사탕을 비싸게 팔고 기지 전체 물품 지원을 잘 해주면 안 되나. 그럼 엔지니어들도 좋고, 나도 좋고…….


신기할 정도로 꼭 기분 좋은 강도로 몸을 누르는 부드러운 손길과 간간이 들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눈이 또 깜빡 잠긴 틈에 박무현은 잠시 꿈을 꾸었다. 달콤한 초콜릿과 사탕, 젤리들의 가격이 폭등해서 기지 내 최고 사치품이 되는 꿈. 그 결과 사람들이 사탕을 못 먹고 이가 썩지 않아 치과가 텅 비는……게 아니라, 사탕 한 알을 놓고 치열하게 주먹질하다 치아를 날려 먹어서 환자가 진료실 가득 미어터지는 것까지 보고는 헉, 하고 눈을 떴다. 등 위에서 목소리만 들려주던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떡하니 놓여있었다.


“……저 잤습니까?”


왜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나 했더니, 언제 끝나나 싶던 안마가 진작 끝났는지 신해량이 자신이 누운 침대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있었다. 아이고, 그냥 깨우지! 자다가 침이라도 흘리진 않았으려나? 재빨리 입가를 훔치는 손등이 민망함에 화다닥 달아올랐다.


“어, 그럼 이번엔 제가…….”


늦잠 잔 아침처럼 허둥지둥 내려온 박무현의 손이 구겨진 침대 시트를 두드려 펴는 것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신해량이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손이 별로 크지는 않으시군요.”


그리고는 한 번 비교해보라는 듯 자신의 손을 쫙 펴서 내밀기까지 했다. 그런가? 박무현도 자신의 손을 펴고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글쎄다. 대학에서도 치과에서도 딱히 손이 크다, 작다 하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가 평균이고 저쪽이 큰 거 아닐까.


손이 작아서 안마가 시원찮을까 걱정하나 싶어서 그래도 나름 악력은 좋다고 힘껏 주먹을 쥐어 보이며 안심시켰다. 신해량을 침대로 이끌며 발치 횟수도 해량 씨보다 제가 더 많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것에 작은 바람 소리 같은 웃음이 따라왔다. 안 믿나? 내가 그래도 경력이 10년인데.


저항 없이 끌려온 커다란 몸이 침대에 순순히 엎드렸다. 박무현은 자신의 침대에 누운 남자를 묘한 기분으로 내려다보았다. 해저기지에 와서 여러 날을 누워 봤지만 침대가 작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는데, 저보다 키가 한 뼘은 큰 사람이 누우니 갑자기 확 작아 보여서 신기했다. 숙소 침대 크기는 다 똑같을까? 그럼 이렇게 큰 사람은 어떻게 자나. 넓은 등판에 손을 올리고 잠시 감상하며 멈춰있는데 갑자기 불청객의 노크 소리가 똑똑,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파크, 방에 있어?”


헉. 반사적으로 문을 쳐다본 박무현이 다시 침대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악명높은 엔지니어 팀장을 침대에 눕혀놓고 옆에 돈을 쌓아둔 수상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박무현은 신해량이 엎드린 상체를 일으키기도 전에 이불을 확 끌어다 그를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일어나려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멈칫한 신해량은 멀어지는 발소리 끝에 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을 들으며 그대로 조용히 이불 속에 몸을 눕혔다. 조금 전까지 여기에 엎드려 잠들었던 몸이 남겨놓은 온기와 그 몸을 매일 밤 덮었을 이불 사이에. 침대 구석에 있다가 졸지에 그와 한 이불을 덮게 된 주황색 고래 인형만이 동그란 눈으로 그를 감시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무현의 성을 제대로 발음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만만한 표정의 이웃에게서 먹을거리를 한 아름 선물 받은 박무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아무것도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이 방에, 침대 이불 속에 누구를 숨겨놓았다고는……헉, 아직도 이불 속에 그대로 있잖아!


“해량 씨?”


나처럼 잠들어버렸나? 자신이 덮어놓은 그대로 산처럼 둥글게 부풀어있는 이불 끝을 살며시 걷어내자, 얌전히 숨어있던 신해량이 눈을 맞춰왔다. 반듯한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덕분인지 아까보다 두 살쯤은 어려 보이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천천히 몸을 세운 신해량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한 손으로 슥 쓸어올리고는 빳빳한 배춧잎 한 장을 베개 옆에 더 얹어놓았다.


“예? 이불 속에 있을 때 또 나왔다고요?”


이불 속에 뒤집혀있던 노을이를 적당한 곳으로 옮기던 박무현이 중얼거렸다. 무슨 원리지 대체? 몸이 닿았을 때 나오는 게 아니었나.


하긴, 이상한 일에 원리를 따질 수나 있을까. 접촉한다고 다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악수할 때도 나오더니 나중엔 시험 삼아 5분 넘게 손을 맞잡고 있어도 안 나왔고, 안마받을 때도 계속 떨어진 건 또 아니었고…….


“저는 안 해주실 겁니까.”


아. 생각에 빠지느라 아래로 내려갔던 시선을 올리니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신해량이 보였다. 나만 받고 입 씻으면 안 되지. 


박무현은 신해량을 침대에 도로 눕히고 단단한 뒷목과 어깨, 팔뚝을 열심히 주물러주었다. 돈은 아까 나온 게 끝인지 더 나오진 않았지만, 박무현은 안마에 집중하느라, 그리고 노을이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에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방을 바꿔서 자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불 속에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돈이 나왔으니까. 굳이 만날 시간을 조율하고 보는 눈이 없을 만한 장소를 찾아서 이번엔 어딜 어떻게 만져볼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럴듯한 설명이 뒤따랐다.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이불 밑에서 그랬던 것처럼 앞머리를 조금 내리고 있는 신해량을 멍하니 올려다보느라 박무현이 대답할 타이밍을 조금 놓친 사이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방을 바꾸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엔지니어에 채굴팀, 연구직까지도 여러 이유로 방을 바꾸는 일이 흔하다고 했다.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우리뿐이겠지만. 숙소 방문은 기본적으로 자기 지문이나 시계, 패드로 열어야 해서 물건을 서로 바꾸는 일도 있다지만 저쪽은 팀장 권한이, 이쪽은 의료직 권한이 있어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편리한 점이었다. 거절할 이유가……있나?


“음, 알겠습니다. 해량 씨 방에서 제가 조심해야 할 게 있을까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거라거나. 이건 열면 안 된다거나. 박무현은 침대 밑에 숨겨놓은 일기장 같은 귀여운 걸 생각하고 물은 거였지만, 신해량은 다른 걸 떠올리는지 미간을 살며시 모으다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딱히 위험한 물건은 없습니다.”


그러고도 조금 더 고민하다가 바닥에 둔 꽃 화분만 안 건드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꽃도 키우는구나. 박무현은 살랑거리는 앞머리에서 애써 눈을 떼었다. 그런 자연 친화적이고 평화로운 취미 좋지. 사람 강냉이 수확보다야 적극 찬성이다.


‘내 방에 돌아가면 청소부터 해야지.’


창문 열고 환기…는 못 하는구나. 이불 세탁하고 건조기 돌릴 시간은 될까? 복도를 걷는 박무현의 걸음이 괜히 급해졌다.


중앙동을 지나다 우연히 신해량을 만나 복도 구석에서 속닥거렸던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새로운 제안에 오케이를 받아낸 신해량은 금방 돌아서서 갔지만 그 후 내내 그가, 그의 방에 대한 생각이 박무현의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침대 크기가 똑같을지 궁금해한 게 얼마 전인데 직접 확인할 일이 생기네. 신기하다고 말하면 좀 이상해 보이겠지? 팀장이라 방이 더 넓다거나 하진 않겠지. 꽃은 무슨 꽃일까. 아, 오늘 물은 내가 줘야 하나? 설마 물을 주다가 잘 안 보이는 구석에서 털어온 치아를 전리품으로 수북하게 쌓아놓은 걸 발견하는 오싹한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건…….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예?”
“신나 보이시는데.”


나……지금 무서운 생각 하고 있었는데. 차마 말은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지만, ‘붉은 산호’의 후미코 씨는 텀블러 가득 갓 내린 커피를 채워주며 웃기만 했다. 자영업자의 영혼 없는 립 서비스라기에는 재밌는 걸 구경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좋은 일…….’


손에 쥔 텀블러가 식기 전에 백호동 22번 방 앞에 선 박무현에게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방을 바꿔 자 보자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던 건 마땅히 거절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쪽이 더 마음 편할 것 같기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이.


남의 방에서 자는 게 왜 편한가. 솔직히 말한 김에 조금 더 솔직해지자. 신해량의 얼굴을 보고 손을 잡으면서, 손가락을 얽어 빈틈없이 깍지를 끼면서, 아니면 다른 어딘가를 만지거나 만지게 두면서 떨지 않을 자신이……없다. 손이 안 떨리면 얼굴이라도 터질 것 같다.


계속하면 익숙해지기 마련일 터인데 자신에게 올 익숙함이 상대에게 잘못 가버렸는지 오늘은 어디서 볼까요, 어디를 잡아봐도 되겠습니까, 하는 신해량만 조금도 떨지 않고 아주 덤덤해 보였다. 그보다 몇 년은 더 살고 못해도 밥을 천 번은 더 먹었을 자신은…….


‘……죽겠다.’


심장아, 진정해라. 쓰리 샷 아직 안 마셨다. 아직 손에 들고 있다고. 박무현은 텀블러를 꽉 움켜쥔 채 22번 방문에 이마를 콩 찧었다.


그래서 방만 바꾸는 게 편했던 거고. ……그런데도, 좋았던 거고.


나 이래도 되나.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불안함을 닮은 두근거림이 가슴 안쪽을 두드렸다. 정 안 되겠으면 그냥 다 그만두자고 하는 게 맞겠지만. 하지만 그건 좀…. 박무현은 지문을 찍고 문을 열면서 속에 걸리는 감각에 붙일만한 말을 찾아 고민했다. 그건 좀, 아쉽…….


그래. 그러긴 아쉽다. 용감하게 인정하며 고개를 든 순간, 열린 문 너머에서 전혀 아쉽지 않은 장면이 선물처럼 짠 나타났다.


“헉, 아니…헉!”


두툼한 몸에 조각처럼 섬세하게 새겨진 근육에 첫 숨을 들이켜고, 손을 올려 눈을 가리려다가 흔들린 텀블러가 커피를 주륵 뱉어내는 바람에 두 번째 숨이 터져 나왔다. 아니 왜…, 왜 지금 여기서 옷을 벗고 있냐!


“어, 그……그, 저 이제 방에 간다고 메시지…남겼는데요.”


저 이제 해량 씨 방에 가서 자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인사까지 분명 써서 보냈는데. 아직 오면 안 된다고 말 안 했잖아. 주춤주춤 물러난 등이 그새 닫혀버린 문에 닿았다.


“예. 봤습니다.”


얇은 티셔츠를 머리 위로 끌어올려 벗는 간단한 행위를 느긋하게 끝낸 신해량이 옷자락에 쓸려 흐트러진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잠깐 옷 갈아입으려고 왔습니다.”


그래, 원래 그쪽 방이니까. 그래……. 박무현은 애써 고개를 돌리고 텀블러에 입을 갖다 댔다. 지금 손이 떨리는 건 커피 때문이다. 나이 한참 먹고 남자 맨몸 좀 봤다고 떨리는 게 아니다….


박무현이 바닥에 놓인 꽃 화분만 쳐다보는 사이 옷을 갈아입은 신해량이 문가로 다가왔다. 남자의 그림자에 몸이 덮이기 전에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서 그가 나가길 기다리는데, 신해량은 문을 여는 대신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밖에 누가 있군요.”


그 말대로 문 너머에서 몇 명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섞여 들렸다. 조금 있다가 나가겠습니다. 속삭이듯 말하는 것에 박무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방주인을 나가라고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문을 열었다가 저들하고 마주쳐서 왜 둘이 이 시간에 거기 같이 있냐는 소리를 들으면 할 말도 없고.


하지만 문밖의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만 하고, ‘조금 있다가’를 세 번쯤 더 말하고 난 뒤에는 무언가 다른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먼저 주무셔도 됩니다. 저는 적당히 봐서 나가겠습니다.”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면 누가 복도에서 술판을 차린 모양이라고,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는 듯 말하는 신해량에게 박무현이 잠깐 머뭇거리다 슬그머니 물었다.


“몇 시에 일어나십니까?”


기상 시간을 묻는 말에 신해량은 잠시 시계를 보고는 꽤 이른 시간을 짚었다. 박무현은 그때까지 남은 시간을 헤아리다 입을 벌렸다. 세상에. 여섯 시간도 안 남았다. 벌어졌던 입이 금방 굳게 다물렸다.


“……그냥 여기서 주무시죠.”
“같이, 말입니까.”


수면시간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젊다고 몸 막 쓰다가 서른 넘어서 후회합니다. 말은 단호하게 하면서 저를 똑바로 올려다보지는 못하는 얼굴에 신해량은 두 번 묻지 않고 작게 웃으며 바로 물러났다.


야외도 아니고 이 정도면 침낭도 필요 없다, 맨바닥에서 자겠다는 소리를 하는 태평한 20대를 여기 원래 당신 방이다, 그럴 거면 당신이 침대에서 자고 내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큰소리쳐서 침대로 끌어올린 것까지는……좋았는데. 박무현이 어색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냥 바닥이 나을 걸 그랬나…….’


뻣뻣하게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졌다. 최대한 일자로 곧게 누워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도 어깨가 살짝 닿은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잘 때 바로 옆자리에 누가 있는 것부터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연 단위로 헤아려도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과 평온한 숨소리에 자꾸만 쏠리는 신경을 방해하기 위해 그 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어느 때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귀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 생각을 하십니까.”
“아, 동생이요. 이렇게 같이 잤었지, 하고.”
“……애인 생각이라도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애인이 있으면 이러면 안 되지 않나요.”


자신의 대꾸에 신해량이 소리 없이 웃는지 닿아있는 어깨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험악한 소문에 비해 자주 웃는 사람이었다. 천장을 보던 눈이 옆을 살짝, 아주 살짝 더듬었다.


“해량 씨는 애인…….”


충동적으로 말을 꺼냄과 동시에 갑자기 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올라왔다. 놀란 토끼 눈으로 올려다보니 자신의 위로 팔을 뻗은 너른 가슴과 끝내주는 턱선이 코앞에 있었다. 키 차이가 있으니 밑에서 보는 게 새삼 낯설 건 없는데, 없어야 하는데, 묘한 기분이 차가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더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돈이 떨어진 걸 줍는 모양이었다. 돈을 보느라 자신이 꺼내려던 말은 못 들었기를. 속으로 작게 기도한 박무현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눈꺼풀 위에 드리운 그림자가 원래 자리로 물러난 다음에도 수를 백오십쯤 세다가, 옆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눈을 살며시 떴다.


천장을 보고 누운 몸과 달리 고개는 이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었지만, 눈은 확실히 감겨있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거기엔 남의 영구치를 깨버리는 캐새끼도, 한 팀을 책임지는 팀장도 아닌 그냥 잘생긴 20대의 청년이 무방비한 얼굴로 잠들어있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이 곤히 잠든 눈을 간지럽힐 것 같아 무심코 손을 내밀어 살며시 걷어내는데, 시야 구석에 푸르스름한 종이가 들어왔다. 방금 막 떨어지기 시작한 새 지폐였다. 이대로면 자는 얼굴 위로 떨어져서 잠을 깨우게 생겼다. 박무현은 신해량의 머리 위로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신해량은 몇 번이고 턱턱 잘만 잡아내던데 왜 이렇게 안 잡히는지!


떨어지는 돈을 잡으려다 잠든 몸 위로 넘어질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박무현은 자신이 허우적대는 와중에도 용케 깨지 않는 신해량을 내려다보며 숨을 돌렸다. 정신 차리라고 하늘에 혼이라도 난 기분이 들었다. 박무현은 돈을 곱게 접어서 옆에 놓고, 신해량을 등지고 옆으로 꾸물꾸물 돌아누웠다. 똑바로 눕는 것보다 옆으로 자는 게 안 좋다지만 적어도 지금은, 마음에는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엔 정말로 잠든 박무현의 뒤에서 신해량이 조용히 눈을 떴다. 등을 돌리고 누운 몸을 가만히 보던 팔이 슬쩍 허리를 안고는 안쪽으로 바짝 당겨 안았다. 이번에도 신호하듯 돈이 팔랑거리며 떨어졌지만, 그대로 바닥까지 내려가 침대 밑으로 들어가든 말든 허리에 감긴 팔은 새벽 내도록 풀리지 않았다.







[괜찮으시면 오늘도 어떠십니까.]


박무현은 지난밤이 지금까지 중에 돈이 제일 많이 나왔다고 말하는 메시지를 어두운 눈으로 한참 노려보았다. 괜찮냐고? 일어나보니 신해량은 먼저 나갔는지 없고 머리맡에 예상보다 많은 지폐가 수북하게 쌓여 있어서 기겁하긴 했지만, 방에서 나오는 길에 복도에 널브러진 술 취한 다팀 엔지니어들을 밟지 않으려고 고생을 하긴 했지만, 며칠 전이었다면 흔쾌히 괜찮다, 그러자고 답장했을지도 몰랐다.


그치만……안 되겠다. 전혀 안 괜찮다. 더이상 자신의 흑심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젯밤엔 신해량의 품에 안겨서 자는 꿈까지 꿨다. 다시 생각해도 귀까지 뜨거워졌다. 미쳤지, 미쳤어…….


아침 식사로 뜨끈한 국을 가득 퍼다 앉은 박무현은 마침 저 멀리 보이는 신해량을 힐끗 살폈다. 자신이 얼마나 속이 시커먼 사람과 한 침대를 썼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 엔지니어 가팀의 팀장은 다팀의 팀장과 무언가 심각해 보이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손에 쥔 숟가락이 힘없이 국을 휘휘 저었다. 다팀은 러시아에서 지원을 잘 받으려나. 돈이 남아도니까 반입금지 물품인 술도 그렇게 궤짝으로 갖다 퍼마시고 그런 거겠지? 생각할수록 입이 썼다. 돈이 필요한 사람을 흑심을 품고 이용할 수는…….

 

겨우 힘내서 한술 뜨기도 전에 저 멀리서 작게 소란이 일었다. 가팀, 다팀과 약간 다른 색의 슈트를 입은 남자가 신해량을 향해 뭐라고 소리치며 지나가느라 난 소리였다.


뭐지? 영문을 모르고 기웃거리는 박무현과 달리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마치 일상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떠들어댔다. 리웨이 저 새끼는 지겹지도 않나. 내가 하이윤이어도 쪽팔리겠다. 쪽팔리기만 하냐? 나였으면 죽여서 상어 먹이로 뿌렸다, 따위의 말들이 여러 언어와 여러 목소리로 빠르게 들리다가, 그중 하나가 유독 박무현의 귀에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아, 동양인 팀장 둘이 사귄다는 게 그 둘이었어? 씬이랑 하이윤?”


이놈은 어제 입사했냐? 왜 몰라? 낄낄대던 목소리들이 온갖 소문을 추가로 더 뿌려댔다. 벌써 가족한테 얼굴도 보여줬다던데. 그거 있잖아, 뭐라더라. 선? 맞선? 그럼 남자친구가 아니라 약혼자인 거야?


“…….”


체할 것 같다. 그저 소문일 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반, 애인 있으면 이러면 안 되지 않냐는 말에 웃기만 했던 게 그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반이었다. 물론 우리가 뭘 한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다. 박무현은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밥을 씹어 삼키고, 양치를 하고, 거품을 뱉어낸 힘으로 마지막 충동에 몸을 맡겼다.


“이제 그만합시다.”


그 말을 들은 신해량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놀란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박무현은 쓰게 웃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준비해 온 것이 그 안에서 부스럭거렸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음, 일단은…제가 하이윤 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신해량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했지만 당장 해명을 꺼내지는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박무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털어냈다. 나도 참, 뭘 기다리는지. 대신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반씩 나눠 받은 돈이 고스란히 들어가 제법 두툼하게 잡혔다.


“제가 일방적으로 그만두자고 한 거니까 제 몫도 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제가 신경 쓰여서 그럽니다.”


부러 단호한 태도로 말을 자른 박무현은 전혀 받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신해량의 손을 끌어다 봉투를 직접 쥐여 주었다. 이번만큼은 손이 닿아도 떨리지 않았다.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뭡니까.”


다른 이유도 있습니까? 돈 봉투를 넘기고 홀가분하게 떨어져 나가는 손을 커다란 손이 붙잡고 물었다. 거기엔 뭐라고 말할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허공에서 짤랑, 하고 돈이 떨어졌다. 종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금속이 바닥을 때리고 굴러가는 또렷한 소리가 두 사람의 발치를 맴돌았다. 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백 원짜리 동전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
“…….”


동전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바닥에서 반짝이는 100이라는 숫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박무현이 잡힌 팔을 빼내며 웃어 보였다.


“이제 나올 돈도 없나 봅니다.”


계속할 이유가 없어진 게 곧 다른 이유가 되어준 셈이었다. 차라리 잘 된 거지. 다시 동전을 보다가 돌아선 박무현의 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


홀로 남은 신해량은 멀어지는 박무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늘도 잡아 내린 앞머리가 이마를 간지럽혔다. 박무현이 건네주고 간 봉투도 한 번씩 보다가, 박무현이 아주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고 나서야 조용히 허리를 숙여 바닥의 동전을 주워들었다. 


 





나 분명……홀가분하게 돌아왔는데. 박무현은 푸석푸석한 얼굴을 문지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1인용 침대인데 옆자리가 허전한 이유는 뭘까. 같이 잔 건 딱 하루뿐인데. 사람의 몸이 원래 이렇게 간사한가.


딥 블루 상담실 의자에 앉은 박무현은 피곤을 떨칠 무설탕 사탕을 하나 입에 물고 패드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첫 시간에 예약을 잡았던 환자가 갑자기 예약을 취소해서 시간이 붕 떠버린 차였다.


커피 들고 바람이나 쐬러 대한도 해변에 갈까 고민하던 차에 누군가 딥 블루의 문을 두드렸다. 예약 취소한 사람이 다시 온 건가, 아니면 예약도 못 하고 달려올 만한 급한 환자라도 있나 싶어 열어 준 문으로 신해량이 성큼 들어왔다. 손에는 박무현이 쥐여 주었던 봉투가 그대로 들려있었다.


“어…….”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안 받겠다고 말하려는데 신해량이 먼저 선수를 쳤다. 하이윤 얘기입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던 박무현은 하이윤의 이름을 듣고는 재빨리 입안에 든 포도맛 사탕을 굴리는 데에 신경을 쏟았다. 그 이름에 불편해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무슨 죄인가.


“집안에서 강요하는 약혼을 막기 위해 가짜 남자친구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 사진과 인적사항을 빌려준 적이 있습니다. 사귄다는 소문은 그래서 난 겁니다. 애인 없습니다.”
“……예?”


상상도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단숨에 쏟아져 나왔다. 박무현은 놀라서 사탕을 깨물어버렸지만 신해량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 얘기를 하려면 당사자의 동의도 필요할 것 같아서 어제 말하고 왔다거나. 목표였던 파혼도 성공했다고 하니 이제 괜찮다거나. 리웨이는 하이윤 주변에 있는 수컷이라면 해파리한테도 시비를 걸 멍청한 놈이니 더더욱 신경 쓸 거 없다거나.


애인이 없다는 말에 속없이 부풀어 오르려는 가슴을 누르느라 그 긴 설명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박무현은 작아진 사탕만큼 조금 달아진 혀로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핥다가 눈을 깜박였다.


“그건…알겠습니다. 근데, 그래도 이제 저희는 돈이 안 나오는데요. 백 원 보셨잖아요. 계속할 이유가…….”
“드라이슈트가 한 벌에 4800달러쯤 합니다.”
“……예?”


신해량은 이것도 미리 준비해왔다는 듯 곧장 패드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온갖 장비들의 사진이 눈이 휘둥그레질 가격을 달고 있었다. 


슈트는 인당 최소 두 벌은 갖추고, 조금이라도 찢어지거나 망가지면 바로 새 걸 구매한다. 장갑, 신발, 조끼. 마스크도 마찬가지고, 바닷물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돈을 물에 녹이고 나오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청하지도 않은 긴 설명이 이어질수록 박무현의 눈동자가 나름의 답을 찾아 굴러다녔다. 음, 그래서 태산을 메우기 위해 티끌이라도 모으겠다는 건가…?


“그래서 필요하다면 석 달에 한 번 정도……도박판을 갑니다.”
“……예에?”


이건…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신해량의 입에서는 박무현이 예상할 수 없는 얘기만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미리 대본이라도 구상해 온 것처럼 한 마디도 막힘이 없었다. 자신이 오기 전에는 예산도 부족하고 월급도 다른 팀에 빼앗기는 신세였지만 이젠 아니다, 지폐든 동전이든 돈이 궁하지 않다…….


“……그럼, 왜…?”


그러면 계속할 이유가 정말 없는 거 아닌가. 다시금 묻는 박무현을 빤히 보던 신해량이 한쪽 눈썹을 휘고 웃으며 작게 목을 울렸다. 마치 기분 좋은 짐승의 것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제가 그동안 필요 없는 다른 핑계를 대면서까지 단둘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있을 시간을 늘렸던 이유를, 그리고 지금 그걸 다시 하자고 찾아온 이유를 정말 물으시는 겁니까?”
“…….”


정말로? 그 한 마디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박무현의 얼굴이 목 아래서부터 이마까지 서서히 달아올랐다. 흔들림 없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 바닥을 보고 있다가, 귀에 건 통역기만큼이나 온통 새빨개진 얼굴로 결심한 듯한 눈이 고개를 들었다.


“……예.”


신해량이 기다렸다는 듯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원하신다면야.


“못할 것 없지요.”


그 말을 끝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박무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돈이 또 나올지, 동전일지 지폐일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입안에 맴도는 포도향이 지나치게 달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신해량의 입에도 그렇게 느껴질지는 이제부터 두고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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