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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예서] The Sleeping Swallow “……그러니까.” 위대한 백곡왕의 해방자, 대 랑부예 가문의 자랑스러운 분홍 타마, 우리의 명탐정 함-크리스텔-가인께서 가상의 콧수염을 매만지며 상황을 한 줄로 정리했다. “제비 놈이 잠자는 숲속의 제비가 됐다고요?” 침대에 누워있는 제비, 아니 지브릴 디오프는 자신에게 붙은 이상한 수식어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대신 그와 같은 조상을 둔 사내가 옆에서 수려한 눈썹을 까딱였다. “지금 숲이 왜 나오지? 사고가 발생한 장소는 실내 아니었나.” “뭐래. 동화 몰라요?” 위에서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를 삐딱하게 올려다본 가인은 여기는 없나, 중얼거리고는 손을 대충 허공에 휘저었다. “뭐, 그런 거 있어요, 재수 없게 저주에 걸려서 백 년쯤 꿀잠 자다가 한참 연하랑 결혼하신 분 얘기.” .. 2024. 2. 5.
[해량무현] 미래진행완료 5(.5) ◇ 이렇게 끝이라고? 진짜? 박무현은 노을이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갑자기 갔던 거니까 갑자기 오는 것도 이상할 건 없지만……진짜로? 끈질긴 추궁에도 주황색 천에 까맣게 박힌 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옆구리에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던 꿰맨 흔적도 없었다. 분명 어제 신해량과 세탁실까지 같이 와서 건조기를 열었을 때 눈으로 보고, 손으로도 만져서 확인했었는데. 이게 자신이 꿰맨 부분이라 알려주던 목소리도 아직 귀에 생생한데, 하룻밤을 자고 난 지금은 다시 바늘 자국 하나 없이 말끔해졌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자. 꿰맨 게 없어진 게 아니라 노을이가 어제 먼저 원래 자리로 돌아왔고, 밤이 지나는 동안 자신이 그 뒤를 따라 돌아온 거라고. 건조기 안에서 신해량이 꺼내는 노을이를 보는 순.. 2023. 12. 24.
[해량무현] 미래진행완료 4 “아, 금이 씨. 가영 씨!” 카페에 들렀다가 몇 달 전에 없어진 메뉴가 아직, 당연하게 남아있는 걸 보고 너무 들떴던 걸까. 갓 나온 빵을 한 아름 끌어안고 지나가는 유금이, 김가영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 박무현은 돌아오는 어색한 반응에 아차 하고 손을 내렸다. 2개월이었지. 주작동에 상주하는 연구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해지기에는 아직일 때였다. 그나마 유금이는 첫날에 빵도 얻어먹었고 치과에서도 제일 먼저 만났고 붙임성도 좋은 데다가 논문 쓰는 것에 지친 사람이라 자주 얘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김가영은……이맘때쯤에는 아직 대화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놀랐겠네. 미안해라. 텀블러를 챙기고 머쓱함에 목 뒤를 주무르며 걷다가 이번에는 신해량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늘 그.. 2023. 12. 24.
[해량무현] 미래진행완료 3 박무현은 가운 주머니를 계속 힐끔거렸다. 무설탕 사탕을 먹고 남은 쓰레기 아니면 카페 영수증 정도나 쑤셔 넣고 잊었던 주머니지만, 오늘은 낯선 무게를 담고 있는 탓에 자꾸만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주머니에 든 것은 딱 신해량의 손목에 맞춰서 만들었는지 자신에게는 조금 많이 남는 크기의 팔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앞에 떡하니 놓인 미남의 얼굴에 한번 놀라고, 허둥지둥 일어나다가 손목에 모르는 팔찌가 감겨있어서 한 번 더 놀라게 만들었던 바로 그 녀석.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억은 어제 그대로인데, 대신 없던 물건이 생겨난 건가 싶어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옆에 누워있던 신해량이 자기 팔찌라고 해서 냉큼 풀어주려고 했지만, 팔찌 채로 손목이 덥석 잡혔다. “그냥 하고 계십시오.” 지금은 그게 더 마음이 놓일.. 2023. 12. 24.
[해량무현] 미래진행완료 2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신해량의 근육에 바짝 힘이 몰렸다. 두툼한 팔뚝만이 아니라 방 안에서 문을 바라보고 선 몸 전체가 어떠한 습격에도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였다. 신해량의 스위치가 켜진 건 조금 전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부터였다. 발신인은 2개월 전 해저기지에 입사한 한국 국적의 치과의사 박무현. 내용은 밑도 끝도 없이 ‘지금 잠깐 가도 되냐’는 한 마디. 대체 왜? 오며 가며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한 적은 있지만,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치과에 간 적도 없고. 자신에게 맞은 멍청이들이 치과에 많이 가긴 했겠지. 그걸 따지려는 건가? 그런 거라면 아까 저녁 시간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박무현의 이름을 이용한 것이거나. 한국인.. 2023. 12. 24.
[해량무현] 미래진행완료 1 “선생, 진지하게 말하는데 다시 생각해봐.” 실제로는 문장의 절반 이상이 '으어우어어' 정도로 들렸지만, 심해의 유일한 치과의사인 박무현은 환자의 으어어 소리만 10년 넘게 들어 온 숙련된 치과의였으므로 되묻지 않고도 제대로 알아들었다. 오늘만 세 번째 듣는 소리기도 했고. “아무리 사람이 급해도 씬 그 새끼는…….” “네, 혀 움직이지 마세요.” 환자는 주먹 쥔 손을 허공에 흔들어가며 강하게 어필하려다가 그보다 더 맹렬하게 돌아가는 기구 소리에 주먹 대신 고래 인형을 다급히 쥐었다. 진료가 끝나고 충치와 함께 영혼이 갈려 나간 얼굴이 된 그는 하려던 말도 잊고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나갔지만, 뭐라고 하고 싶었는지는 이미 안다. 아무리 그래도 씬 그 새끼는 아니다. 다시 생각해라. 차라리 내가 다른 사람을.. 2023. 12. 24.